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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에 부활한 태양 숭배? ‘피’의 오각형을 멈춰라!

[장석준의 ‘적록 서재’] 루이스 멈퍼드의 <기계의 신화 2>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

기사입력 2013-02-01 오후 6:59:47

‘루이스 멈퍼드’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에리히 프롬의 책에서였다. 프롬은 다른 저자들을 인용할 때 호불호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카를 마르크스, 지그문트 프로이트, 바루흐 데 스피노자 그리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이런 이름들은 그에게 항상 어둔 밤하늘을 밝히는 빛나는 별과도 같았다.

하지만 프롬의 동시대 저자들 중에서 이런 대접을 받은 이는 별로 없었다. 현대로 넘어올수록 프롬은 다른 저자들에 대해 엄격한 비평의 잣대를 들이댔다. 한때 프랑크푸르트학파 동료였던 허버트 마르쿠제조차도 신랄한 비판 대상이 됐다.

여기에 예외가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멈퍼드다. 프롬은 늘 막역한 동지처럼 그의 이름과 저작을 인용하곤 했다. 마치 현대 사회의 병리에 대한 자신의 진단과 대안을 뒷받침할 가장 강력한 원군으로 여기는 듯했다. 그래서 프롬의 열성 독자라면 멈퍼드도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멈퍼드는 오랫동안 우리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저자였다. 몇십 년 전 그의 저서 한두 권과 선집이 출판된 적이 있으나 지금은 도서관이나 헌책방에서도 찾기가 녹록치 않다. 적어도 한국에서 그는 오래 전에 망각된 사상가였다.

그러던 것이 몇 년 전부터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텍스트 출판사에서 2010년부터 ‘루이스 멈퍼드 시리즈’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주요 저서 <유토피아 이야기>(박홍규 옮김), <예술과 기술>(박홍규 옮김), <인간의 전환>(박홍규 옮김) 등이 우리말로 소개되었다. 그리고 작년 말에는 드디어 결정적 저작 <기계의 신화 2 : 권력의 펜타곤>(김종달 옮김, 경북대학교출판부 펴냄) 국역본이 나왔다.

기술 비판에서 기계 비판으로

루이스 멈퍼드는 버트런드 러셀이나 에릭 홉스봄만큼이나 장수한 인물이다. 아직 19세기였던 1895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20세기가 끝나갈 무렵인 1990년에 사망했다. 우리의 경우 이렇게 긴 시대에 걸쳐 생존하며 활동한 사상가로 함석헌이 있다.

멈퍼드와 함석헌의 비슷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함석헌이 60~70대에 그의 가장 절정의 사색을 쏟아낸 것처럼 멈퍼드 역시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대표작 <기계의 신화> 1, 2부를 냈다.

또 다른 공통점은 도무지 한 단어로 규정할 수 없는 다채로운 이력이다. 함석헌은 종교인이기도 했고 시인이기도 했으며 사회운동가이기도 했다. 이 중 어느 하나도 그를 정의하기에는 딱 맞지 않아서 그저 ‘사상가’, 즉 ‘생각한 사람’ 정도로 소개하는 게 적절하다.

멈퍼드도 마찬가지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멈퍼드를 ‘사회학자, 저술가, 교사‘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나열하기로 한다면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도시 계획가, 비평가, 철학자, 사회운동가…. 끝이 없다. 그래서 그 역시도 그저 ‘사상가’라고 하는 게 가장 어울린다. (멈퍼드의 생애에 대해서는 <메트로폴리탄 게릴라, 루이스 멈퍼드>(박홍규 지음, 텍스트 펴냄)를 참고할 수 있다.)

멈퍼드의 이러한 전인(全人)적 면모는 어느 정도 그의 일생의 스승, 패트릭 게디스(1854~1932)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게디스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사회과학자로서, 기존 학문 분과들을 넘나들며 새로운 연구 영역을 개척한 인물이다. 그가 개척한 신대륙은 진화론을 통해 비약적으로 발전한 생물학의 통찰력을 인간 사회에 적용하는 것이었다.

단, 그는 허버트 스펜서처럼 적자생존설을 주창한 게 아니라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노선(<만물은 서로 돕는다>(김영범 옮김, 르네상스 펴냄))에 따라 상호부조의 측면을 강조했다. 그래서 등장한 게 인간과 인간, 인간과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에 주목하는 사회 생태학이었다. 게디스의 생태학은 이후 구체적인 도시 계획론으로 발전했고, 그 실천으로 전원도시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멈퍼드는 게디스의 사상을 충실히 이어받았다. 그래서 그는 무엇보다도 도시 이론 및 계획 분야에서 명성을 쌓았다. 또한 게디스를 통해 크로포트킨의 아나키즘 그리고 노동해방을 전원공동체의 부활과 연결시킨 윌리엄 모리스의 독특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만년의 저작인 <기계의 신화 2> 곳곳에서도 이들의 깊은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멈퍼드가 도시 연구에 몰두하면서 동시에 또 다른 필생의 연구 과제로 천착한 것은 기술 문제였다. 그는 현대 문명의 토대를 이루는 기술 발전 과정에 주목하면서 거기에서 현대 사회의 연원과 전개 방향, 성과와 한계를 읽어내려 했다. 그리고 기술과 예술, 중세 기술과 현대 기술을 서로 비교하면서 점차 현대 문명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갔다. 그 한 성과가 <예술과 기술>이다.

멈퍼드의 기술 문명 비판은 ‘거대 기계’ 비판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그는 고대 문명에 예외 없이 등장한 거대한 토목 구조물들(가령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주목했다. 이것은 엄청난 기술 발전의 산물이지만, 이것을 좁은 의미의 기술로만 이해하려고 하면 벽에 부딪히게 된다.

거대 구조물을 축조한 기술은 그것 자체만으로는 실현될 수 없었다. 고달픈 노역에 의미를 부여해줄 상징 체계가 있어야 했고, 엄청난 규모의 인력 동원이 가능하게 할 사회적 장치들이 필요했다. 그 상징 체계는 인간이 아니라 태양에서 우주의 중심을 찾는 태양 숭배 신앙이었고, 그 사회적 장치는 전제 군주제, 군사 국가 그리고 노예제였다.

멈퍼드는 이러한 사회적 요소들이 고대 기술과 서로 결합돼 하나의 ‘거대 기계’를 구성했다고 보았다. 인류 문명의 어떤 국면에서 돌연 거대 기계들이 등장한 것이다. 피라미드 같은 기적적인 건축물을 만들어낸 것은 다름 아닌 이 거대 기계의 힘이었다.

하지만 인간이 거대 기계의 부속품이 된 결과는 참혹했다. “계급 구조, 평생 동안의 역할 고착, 토지의 독점, 경제적 교육적 기회의 독점, 재산과 특권의 불평등, 노예제도의 고질적인 야만성, 전쟁, 두려움, 강박관념, 통치계급의 과대망상적 야망, 그리고 극단적인 대량 파괴와 대량 살상”(<기계의 신화 2>, 40쪽)이 뒤따랐다. 고스란히 현대의 질병이기도 한 이들 병폐는 결국 노예 반란과 문명의 해체라는 역풍을 불러왔다.

멈퍼드는 이 격변에서, 카를 야스퍼스가 ‘차축 시대’라고 부른 전환기의 의미를 읽는다. 야스퍼스는 중동, 인도, 중국, 그리스 등 고대 문명 곳곳에서 비슷한 시기에 예언자, 깨달은 자, 현인들이 등장하고 오늘날의 모든 고등 종교와 철학이 다 이 시기에 연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이 시기가 인류 문명의 모든 바퀴살이 거슬러 올라가는 원점과 같다고 하여 ‘차축 시대’라 이름 붙였다.

멈퍼드는 차축 시대의 종교와 철학이 거대 기계에 대한 인간의 반성과 저항, 극복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았다. 이들 모두는 태양이 아니라 인간으로 눈을 돌렸고 거대 기계에 참여하길 거부했으며 새롭게 구성된 공동체로부터 문명을 다시 시작하려 했다. 이를 통해 고대의 거대 기계는 일단 무너졌다.

멈퍼드는 <기계의 신화 1 : 기술과 인간 발전>에서 이러한 거대한 역사 드라마를 전개했다. 아쉽게도 이 책은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인간의 전환>(박홍규 옮김, 텍스트 펴냄)에서 그 압축판을 읽을 수 있다.

부활한 거대 기계 – 권력의 펜타곤

<기계의 신화 2>는 1부에서 일단 해체되었던 거대 기계가 인류사에서 재출현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압권은 제2장 ‘태양신의 재림’에서 제5장 ‘기술로서의 과학’에 이르는 부분이다. 이 4개 장은 서구인들이 ‘르네상스’, ‘과학혁명’ 등의 이름을 붙이며 칭송하는 16세기~18세기 지성사의 진상이 무엇인지 파고든다. 놀랍게도 멈퍼드는 그것을 ‘태양 숭배 신앙의 부활’이라 규정한다.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우리의 상식 속에 이 시기는 천동설의 미신에 맞서 지동설의 과학이 승리한 시대, 위대한 계몽의 시대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갈릴레이, 요하네스 케플러 그리고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 시대의 빛나는 영웅들이다. 그런데 멈퍼드는 이들이 마치 고대 전제 체제가 그랬던 것처럼 세상의 중심을 인간 자신이 아닌 바깥 세계에서 찾고 이를 위해 인간성에 대한 관심을 희생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규탄한다.

“물질세계와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을 단순한 양과 운동의 생산물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살아 있는 영혼을 제거해야 한다. 새로운 세계상의 중심에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이유가 없게 된다.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진 행성 위에서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인간 대신에, 불임화된 지식의 특정 생산물인 과학적 이론과 기계만이 영구적인 지위나 높은 수준의 실제를 요구할 수 있다. 객관성에 대한 관심에서, 새로운 과학은 역사적인 인간과 그의 모든 주관적인 행위를 제거했다. 갈릴레이의 시대 이후로 이러한 실행은 ‘객관적인 과학’으로 알려져 있다.” (86~87쪽)

이러한 지적 전환 과정은 사물을 수량 중심으로 파악하는 새로운 인식을 동반했다. 수량으로 환원된 세계에는 한계가 없었다. 우주에 대한 공상에 사로잡힌 인간은 이제 자기 주위의 세계를 무한한 확장의 공간으로 바라보았다. 마침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화와 맞물려 이러한 수량적 세계관은 세상을 끝없는 욕망 실현의 무대로 삼으려는 인간들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곧 우리가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시대의 등장, 그것이다. 하지만 멈퍼드는 그 등장 과정에서 흔히 간과되곤 하는 새로운 세계관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새로운 태양 숭배 신앙’이라고나 할 이 기계적 세계상이 서구에 출현한 전면적인 화폐적 연계 및 고도의 관리 조직, 중세의 다양한 기술을 대체한 단순 기술 등과 결합해 하나의 권력 복합체를 구성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기계의 신화 2>의 부제인 ‘권력의 오각형(펜타곤)’이다.

‘오각형’이라고 부른 것은 이 권력 복합체가 다섯 개의 꼭짓점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이 다섯 꼭짓점은 모두 알파벳 ‘p’로 시작된다. 첫째는 권력(power)이다. 이것이 정치 권력에서 화폐 권력으로 확장하면서 세 개의 다른 요소들과 결합되는데, 생산력(productivity)과 이윤(profit), 자산(property)이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는 더 많은 인간 무리를 이 권력 망 안에 포획하기 위한 선전 활동(publicity)을 수반한다. 근대 세계는 이 ‘권력의 펜타곤’이 끊임없이 확산하는 과정을 ‘진보(progress)’라 불렀다. 흥미롭게도 ‘진보’ 역시 알파벳 ‘p’로 시작한다.

권력의 펜타곤은 근대에 들어 다시 부활한 저 고대의 거대 기계다. 그러나 이것은 고대의 거대 기계를 잇고 있는 것만큼이나 그것과 다른 중요한 차이도 지니고 있다. 그 첫째는 정치 권력과 화폐 권력 사이의 연합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요소는 화폐 경제다. 이로써 새 거대 기계는 역사상 유례없는 경제적 역동성 안에 인간들을 옭아맬 수 있게 된다.대중은 이제 강제 생산과 강제 소비의 다람쥐 쳇바퀴 안에 갇히게 된다.

또 다른 차이는 근대의 정치 권력이 민주적 국민국가의 형태를 취한다는 점이다. 근대의 혁명과 전쟁들은 대중을 직접적으로 국가 권력에 복속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 점에서 멈퍼드는 프랑스대혁명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러시아혁명에 대해서도 차가운 평가를 내린다. 이들 혁명은 하나같이 ‘압제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거대 기계의 부활과 확장에 일조했을 뿐이다.

멈퍼드의 문명 비판이 사회주의에 촉구하는 반성

이쯤 되면 멈퍼드의 현대 문명 비판이 마르크스주의와 갈라지는 지점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우선 멈퍼드는 근대를 자본주의의 경제적 운동 하나만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역사유물론 도식에 따르면 상부구조에 속하는 세계관의 변화를 중요한 요인으로 강조하며, 근대를 경제 권력과 정치 권력, 지배적 세계상의 복합체(‘권력의 펜타곤’)로 바라보려 한다.

물론 오늘날 이런 주장은 다른 많은 사상가들도 동의하는 내용이다(가령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 하지만 <기계의 신화 2> 초판본이 나올 때(1970년)만 해도 이것은 선구적인 주장임에 분명했다.

그런데 사실 더 큰 대립 지점은 다른 데 있다. 멈퍼드는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근대 사회주의-노동운동이 거대 기계에 맞서는 듯 보였지만 실은 그것을 강화하는 역할만 했다고 통렬히 비판한다. 이들은 적의 실체를 남김없이 포착하지 못했고, 그래서 권력 복합체가 주창하는 ‘진보’를 무비판적으로 따라갔다. 멈퍼드는 이렇게 매섭게 평가한다.

“19세기 초부터 이러한 새로운 힘에 대항하기에는 자신들이 무기력하다는 것을 발견한 노동자 계급은 지배 엘리트들이 아닌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위해서 기계가 이용되는 자신들만의 신화―사회주의, 무정부주의, 공산주의―를 가지고 이러한 이데올로기 신화의 자본가적, 군사적 표출에 대항했다.” (216쪽)

“그러나 권력 시스템을 위한 더욱 효과적인 보호막이 존재했는데, 이러한 보호막은 단지 크로포트킨과 같은 인간적인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자만이 인식했다. 즉, 노동자 계급의 혁명 운동은 권력 복합체의 이데올로기적 전제들을 순진하게 받아들였다.

기계적 진보는 불가피하고 실제로 필연적인 것이라는 마르크스적 견해를 통해, 사회주의는 단지 하나의 지배계급에서 다른 지배계급으로의 힘의 양도를 제안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전반적인 메커니즘은 동일하게 남아 있다.

사회주의의 가장 실현 가능한 이상향은 혁명 과정 자체였다. 그리고 일단 혁명이 일어나면, 우리가 소련과 같은 국가에서 보아왔듯이, 다른 국가 내에 공통의 합의와 입법부에 의해 마련된 질서로부터 새로운 질서를 구분하기란 매우 어렵다.” (473쪽)

여기에서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럼 멈퍼드는 현대 기술 문명 전체를 거부하는 것인가? 그는 히피들처럼 반(反)문명주의를 주장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기술 자체와 거대 기계는 구분해서 봐야 한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은 ‘거대 기계’, 즉 기술이 사회의 다른 요소들과 결합돼 만든 특정한 권력 복합체다. 멈퍼드 자신의 설명을 들어보자.

“거대기술의 직접적인 생산물만을 따로 조사한다면, 이런 주장, 이런 약속은 근거가 분명한 것으로 이들 업적은 진짜다. 각각의 이익은 장기간의 인간의 제반 목적 그리고 의미 있는 생활 형태로부터 떼어놓고 보면, 이론의 여지가 없다. 거대기술의 효과적인 조직화의 제반 방식 그 어느 것도, 힘을 절약하게 하는 제반 장치 그 어느 것도, 신제품의 그 어느 것도 (중략) 무시되거나, 하물며 그 자리에서 거절되거나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도 거기에는 꼭 한 가지 단서 조항이 붙어야만 한다. 그것은 권력 복합체의 대변자들이 고의로 누락시킨 사실인데, 이 모든 재화는 보다 중요한 인간적 관심이 무시되거나 말살되지 않는 경우에만 가치가 있는 것이 된다는 사실이다.” (443쪽)

기술 발전에 무턱대고 반대하자는 것도 아니고, 과거로 되돌아가는 길밖에 없다는 것도 아니다. 기술 발전보다 상위의 가치로 “인간적인 균형”(549쪽)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다. 거대 기계가 일단 작동을 시작하면, 끊임없는 자동화가 지상 명제가 되기 때문이다. 자동화를 제어할 힘은 거대 기계 ‘안에는’ 없다. 거대 기계에게 자동화 운동의 정지는 붕괴를 뜻할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괴테의 마법사의 견습생 우화에서 설명하는 자동화의 큰 모순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의 문명은 (중략) 속도를 증가시키도록 하는 마법의 공식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 방식(예견과 사후 관리)이 모든 유기적 과정에서도 분명히 있지만, 이 과정의 템포를 바꾸거나 그 과정이 인간 기능과 목적을 충족시키지 않을 때 그 과정을 정지시키는 우두머리 마법사의 마력을 잃어버렸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견습생처럼 홍수에 빠지기 시작하고 있다. 교훈은 간단하다. 자동화 과정을 정지시킬 수 있는 힘이 없다면, 그리고 그것을 역전시킬 필요가 있다면 그것을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낫다.” (245쪽)

인간은 어떻게 제어력을 되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현재의 거대 기술적 제도와 구조”를 “인간적 규모로 축소”하고 “인간의 직접 통제 아래”(575쪽) 놓을 수 있을까?

비판의 철저함에 비하면, 멈퍼드의 변혁론은 모호하다. 거대 기계의 실패(요즘 식으로 말하면, 생태적 재앙)에 따른 대중의 각성에 기대를 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1960년대에 한창 치열하게 전개되던 학생운동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멈퍼드는 의외로 낙관적이다. 그는 <기계의 신화> 전체를 꿰뚫는 메시지가 거대 기계를 극복하려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려는 것임을 강조한다. 거대 기계의 토대 중 하나가 근대인의 기계적 세계상이라면, 거대 기계는 이러한 세계상에 맞선 대중적 각성에 의해 밑에서부터 허물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권력 시스템이 우선 인간의 마음의 산물이라면, 미래는 많은 개방적 가능성을 가진다.”(576쪽)

생태 사회주의의 출발점 – 멈퍼드의 거대 기계 비판

<기계의 신화>에 따르면, 사회 변혁에 대한 기존의 지배적 관점은 정정되어야만 한다. 이제까지의 주된 관념은 근대 부르주아 문명의 모순이 발전하는 가운데 새로운 사회 주체들이 등장해 그 성과들을 인수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멈퍼드에게 이는 거대 기계의 유지, 확장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현대 문명에 진정 필요한 변혁은 거대 기계의 작동을 정지키시고 이를 해체하는 ‘대전환’이다. 차축 시대의 종교와 철학이 고대의 거대 기계를 허물어뜨렸던 것과 같은 역할을 대중운동을 통해 다시 실현해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계적 세계상을 유기적 세계상으로 대체”하고 “기계와 컴퓨터에 주어졌던 우선권을 가장 고귀한 생명인 인격에 부여”하는 전환이 있어야 한다(554쪽).

멈퍼드에게 대안 사회의 핵심 원리는 자연에 있다. 기계의 원리가 아니라 생명의 원리, 유기체의 원리에 따라 사회를 재구성하면 된다.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384쪽)이, 자동화가 아니라 “공동의 자율성”(537쪽)이, 권력이 아니라 “충만”(531쪽)이 사회의 주된 가치이자 목표가 되어야 한다.

멈퍼드는 이런 비전의 선구자로서 크로포트킨, 모리스, 게디스 그리고 헨리 소로를 든다. 그리고 마르크스도 다시 불러온다. 이때의 마르크스는 다른 무엇보다 <독일 이데올로기>(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박재희 옮김, 청년사 펴냄)의 마르크스, 좁은 분업 체계를 넘어서 개인의 다양한 가능성을 자유로이 실현하는 사회를 염원했던 마르크스다.

멈퍼드가 이들 선구자들에게서 높이 평가한 것은 “금전적 보수에 대한 무관심, 자가 팽창되는 대중성으로부터의 해방, 직업적인 활동의 다양성, 산업적 지적 생산 속도의 의도적 감속, 상위의 인간 기능과 문화적 가치에 대한 집중을 부활시키는 것, 정부를 능동적으로 ‘재흡수’하지 않는 것”(543~544쪽, 마지막 구절은 오역으로, 원래는 “특히 정부를 사회에 실질적으로 ‘재흡수’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고스란히 현대 생태 사회주의가 탈자본주의 변혁의 목표이자 지향으로 제시하는 바다.

이런 맥락에서 멈퍼드의 <기계의 신화> 1, 2권은 마르크스 사상의 어떤 측면 그리고 크로포트킨과 모리스를 관통하던 사회주의-아나키스트 사상의 숨어 있던 광맥을 발굴하고 그것을 전면에 내세운 사회 비판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또한 이 책은 사회주의의 생태적 전환에 영원한 참조 역할을 할 고전이기도 하다.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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