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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최고의 한옥 지구 만든 그는 왜 잊혔나

[김경민의 도시 이야기] <4> 20세기 한국 최초 부동산 업자, 정세권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기사입력 2013-06-26 오후 2:20:43

북촌에서 가장 사랑받는 골목길이자 남산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가회동 31번지, 그리고 종로 3가 뒤편의 허름한 한옥 집단 지구인 익선동 166번지는 서로 매우 다르면서도 같은 점이 있다. 북촌이 당대 지주들을 위한 비교적 큰 규모의 한옥 집단 지구였다면, 익선동은 중산층 이하 서민을 위한 한옥 집단 지구였다는 차이다.

공통점은 두 지역을 모두 한국 최초의 근대 부동산 개발업자, 정세권(鄭世權)이 건설했다는 점이다. 20세기 한국 최초의 부동산 업자, 정세권은 ‘건양사’라는 부동산 개발 회사를 설립해, 큰 대지를 매입하고 분할한 후 한옥 집단 지구를 건설해 일반인들에게 분양했다.

역사 기록 속 정세권은 부동산 개발자라는 이력 외에 다양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한국역사문화정책연구원 김란기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정세권은 조선물산장려회와 조선어학회의 재정적 후원자이자 적극적 활동가였다. 잡지 <실생활>과 <우리말 큰사전> 발간에 크게 이바지하고, 학교 건립과 기부 등 각종 사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이처럼 정세권은 경제적 이득을 꾀했던 단순한 장사꾼이 아니었다. 그는 국가의 경제적 부강과 교육 진흥, 서민 생활 개선을 실제로 고민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북촌이라는 매력적인 동네를 창조한 인물이자, 한국 근대사에 기념비적 역할을 한 기관들에서 활동한 이 인물에 대해 우리는 부끄럽게도 아는 바가 거의 없다.

20세기형 퓨전 한옥, 익선동과 북촌의 탄생

1920년 일제의 회사령 철폐로 일본 자본이 조선으로 유입되자, 미처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던 민족 자본은 큰 위기에 봉착했다. 책 <서울상업사>에 따르면 당시 명동, 용산 일대 남촌 지역에서 주로 거주했던 일본인들은 종로 일대까지 옮겨와 상업 활동을 확장했고 한인의 경제적 기반을 잠식해 들어갔다.

부동산 개발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나타났다. 당시 조선인들은 대형 관급 공사 참여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소자본으로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틈새시장을 찾고 있었다. 마침 서울이 엄청난 규모의 인구 증가를 경험하고 있었던 배경과 맞물려, 조선인들은 도시형 소규모 주택 산업에 파고들었다. 정세권도 그중 하나다. 그는 1910년대 후반 주택 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정세권은 그 속에서도 남달랐다. 그가 만든 한옥은 전통 한옥을 상당 부분 변형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파격적으로 수도와 전기가 들어왔고, 환기와 일조권 등 구조에까지 신경을 썼다. 또 행랑방과 장독대, 창고의 위치를 실용적으로 재배치하고, 대청에 유리문을 달고 처마에 잇대어 함석챙을 다는 등 새로운 시도를 했다. 이처럼 그의 한옥은 20세기형 생활 방식을 고려해 설계된 퓨전(fusion) 한옥이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난을 겪었던 ‘조선어학회 사건 수난 동지회’ 단체 사진(1946년).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정세권이다. ⓒ한글학회 제공

서민 주택 금융을 고민한 부동산 업자, 정세권

정세권은 1925년 <경성편람>에 쓴 ‘건축계(建築界)로 본 경성’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근래의 경향은 일반이 개량식을 요구하는 모양입니다마는, 개량이라면 별것이 아니라 종래 협착하던 정원을 좀 더 넓게 하여 양기가 바로 투입하고 공기가 잘 유통하여 한열 건습관계 등을 잘 조절함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외관도 미술적인 동시에 사용상으로도 견확하고 활동에 편리하며 건축비, 유지비와 생활비 등의 절약에 유의함이 본사의 사명인가 합니다. 재래식의 행랑방, 장독대, 창고의 위치 등을 특별히 개량했고, 또 한편으로 중류 이하의 주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년부, 월부의 판매 제도까지 강구하여 주택난에 대해서는 다소의 공급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을 다시 쓰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현재의 주택난과 관련, 우리 회사는 중산층 이하 서민을 위한 주택이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중산층 이하 서민의 주거 수준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합니다. (당시 서민들은 초가집에 거주했다.) 서민도 한 차원 개선된 주거 환경을 누릴 수 있도록 새로운 형태의 집인 퓨전 한옥에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퓨전 한옥에도 부자 한옥의 특징인 정원이 작게나마 조성돼 있습니다. 그리고 서민 주택은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을 갖추기 위해 100퍼센트 정통 양식을 따르는 고전 주택이기보다는 개량형 주택이 더 적합할 듯합니다. 그런 주택을 분양하면서도 우리는 주택 대금을 입주 시점에 모두 받지 않았고, 다양한 금융 기법을 이용해 연 또는 월 단위로 분양금을 받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에도 서민이 주택을 구매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금융 정책이 여럿 있다. 예를 들어, ‘보금자리론‘은 9억 원 이하 주택에 대해 매우 낮은 금리로 주택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하는 금융 상품이다. 여기서 서민의 주택 구입을 지원하는 주체는 보통 정부 산하 공기업이나 한국주택금융공사 정도다. 민간 회사들은 이런 정책을 좀처럼 내놓지 않는다.

그런데 1920년대 정세권의 회사는 민간 회사이면서도 서민 주택 금융을 제공했다. 한옥을 분양한 후 분양 대금을 입주 후 월 단위로 받은 것이다. 이는 매우 놀라운 일이다. 분양 대금을 입주 전에 일시에 받으면 사업 이익을 조기에 확보할 수 있는데도, 정세권은 서민 편의를 위해 주택 융자를 제공했다.

그간 많은 서민이 뉴타운 건설로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무참히 쫓겨났다. 너무도 과도한 분담금(새 아파트에 들어가기 위해 추가로 내야 하는 돈)이 가장 큰 원인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반면 거대 건설 회사들은 2008년 이전 부동산 호황기에 크나큰 수익을 올렸다. 이들이 아파트 건설로 큰 수익을 얻었다는 것은 싼 비용으로 원래 거주민을 몰아내며, 입주자에게는 큰 분담금 또는 비싼 분양가를 부담케 해 배를 불렸다는 것의 방증이다. 건설 회사들이 원주민의 형편을 이해하고 그들의 편에서 경제적인 보상을 해준 일은 기억 속에 없다. 20세기 한국 최초의 부동산 업자는 서민 편의를 저버리지 않고 사업을 했는데도 말이다.

춘원과 만해가 감사한 인물

정세권은 춘원 이광수의 자택(한옥)을 건설했다. 춘원 이광수는 자신의 수기에서 정세권에 대한 큰 고마움을 표현했다. 특히 정세권의 인품과 민족 정신, 그리고 창의적 사업 방식에 커다란 찬사를 보냈다.

“나는 그(정세권)의 소유인 가회동 가옥을 전세로 빌어서 3, 4개월 살았지만,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는 잘 몰랐다. 다만 가끔 그가 토목 두루마기를 입고 의복도 모두 조선산으로 지어 입고 다니는 것과 머리를 바짝 깎고, 좀 검고 뚱뚱한 영남 사투리를 쓰고 말이 적은 사람인 것만 보았었다. (중략) 조선 물산 장려를 몸소 실행할 뿐더러 ‘장산사’라는 조선 물산을 판매하는 상점을 탑골공원 뒤에 두고 조선산 의복과 양복을 장려하고 실생활(實生活)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조선 물산 장려를 선전하는 인물인 줄 알았다. (중략) 조선식 가옥의 개량을 위하야 항상 연구하여 이익보다도 이 점에 더 힘을 쓰는 희한한 사람인 줄도 알았다. (중략) 기타 설계 변소, 마루, 토역재료(土役材料) 등 내가 안 것만 하여도 정씨의 개량한 점이 실로 적지 아니하다. 미다지 밑에 굳은 목재를 붙이는 것도 아마 씨(氏)의 창의(創意)라고 믿는다. (중략) 나는 더욱 정씨의 인격을 존경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중략) 한 사람의 인격의 힘이 이처럼 영향이 큰가를 느꼈다. 이것도 내 집 성조에서 얻은 큰 소득 중의 하나다.”
– <삼천리> 제8권 제1호(1936년 1월 1일) 중

이렇듯 한옥 건설 사업으로 큰 부를 축적한 정세권은 ‘자산가’ 정체성을 가지고도 다양한 사회사업을 지원했다. 그는 조선물산장려회의 회계와 사업 전반을 관리했고, 상업에 밝은 눈을 활용해 물산장려운동을 크게 활성화했다. 특히 대공황기를 맞아 조선물산장려회가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하자, 정세권은 1929년 관훈동 197번지에 있었던 장려회 회관을 익선동 166번지로 이전토록 금전적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에 만해 한용운은 <장산> 지에 ‘백난중분투(百難中奮鬪) 하는 정세권 씨에게 감사하라’는 글을 게재하고 그의 노고를 치하한 바 있다.

조선물산장려회 회관은 1931년 9월 낙원동 300번지로 이전하기까지 익선동에 머물렀다. 그러다 자립 정신과 민족 의식을 고취코자 했던 많은 장려회 이사와 실리적 산업 육성을 추구했던 정세권은 대립하게 됐다. 결국 정세권은 물산장려회에서 나오게 되고 물산장려회는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다 차츰 쇠퇴했다.

정세권은 교육, 특히 출판에 관심이 많아 조선어학회 활동도 적극 지원했다. 일례로 그는 사비를 털어 1935년 화동 129번지에 조선어학회 회관을 제공했다. 이렇게 조선어학회에 관여한 이력으로 정세권은 1942년 일제의 조선어학회 탄압 사건 당시 최현배, 이희승 등과 더불어 큰 고초를 겪었다. 김란기 박사에 따르면, 정세권은 청량리 주변 토지를 일본에 빼앗긴 후에야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인색한 평가…”쉽사리 ‘집 장사’로 매도될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정세권에 대한 평가는 매우 인색한 편이다. 소규모 개량 한옥을 대량 공급해 저소득층 밀집 주거지를 형성한 일은 그간 ‘집 장사’란 단어로 평가 절하돼 왔다. 김란기 연구에 따르면, 당대 최고 건축가였던 박길룡은 귀족 계급 소유의 뜰과 저택을 부수고, 소규모 한옥 밀집 지역을 개발하는 것이 주거 환경을 악화시킨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주거 환경을 악화시킨다는 지적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한 대지에 작은 집을 여러 채 만들면 큰 저택이 한 채 있을 때보다 인구 밀도가 높아진다. 예컨대 1000평 대지에 한 가구가 큰 저택을 가지고 살 때보다 50평짜리 집 20채가 있는 경우가 가구당 거주 인원이 같다는 조건 하에 면적 대비 인구는 20배가 된다. 인구 밀도가 높아지면 주거 환경은 자연히 악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박길룡의 평가는 주거 환경이라는 한 측면만을 바라본 단편적 접근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당시 서울은 인구 급증으로 주택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특히 중산층 이하 서민의 주택 수요는 대단했다. 서민은 초가집 등 기존에 살던 주택의 위생 문제에 시달렸지만 저택을 구매할 형편은 결코 아니었다. 주거 복지 차원에서 서민을 위해 양질의 주택이 합리적인 가격에 공급됐어야 했다. 바로 그 일을 한 사람이 정세권이다.

따라서 크게 보면 주거 환경이 일부 나빠졌을지라도 사회 전체의 편익은 환경 악화라는 비용을 훨씬 뛰어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옥 건설 기술의 맥을 정세권이 이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당시 정세권과 같은 이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한옥 건설 기술은 그 맥이 끊겼을지도 모른다. 정세권의 사업이 결코 과소 평가돼서는 안 되는 이유다.

김란기 연구에 따르면 1900년대 초반 일본인들은 일본식 주택을, 한인 지식인과 부유층은 소위 ‘문화 주택’이라 불렸던 서양식 주택을 선호했다. 그럼에도 정세권은 이들의 취향에 아랑곳하지 않고 식민지 조선 서민을 위한 도시형 한옥을 건설했다. 20세기 초반의 생활 방식까지 고려한 새로운 도시형 퓨전 한옥을 말이다.

▲ 한강 이북에 위치한 한옥 밀집 지구. 2011년 서울시 건축물 대장을 바탕으로 GIS 기법을 이용하여 한옥 밀집 지구를 어렴풋이나마 예측하였다. 익선동(빨간색 표시)이 가장 오래된 한옥 지구로 나타난다. ⓒ김경민

서민 위해 건설된 최고 한옥 단지 익선동 166번지, 그 가치 존중받아야

현재 익선동 166번지는 깨끗하고 화려한 외관과는 거리가 멀다. 다만, 북촌 역시 10년 전에는 익선동 166번지와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한옥의 보존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10년의 세월은 어마어마한 차이를 만들어버렸다.

조선물산장려회의 후원자이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던 역사적 인물이 역사적 건물들을 지은 곳이 익선동 166번지와 북촌 가회동이다. 하지만, 우리는 당대 지주들을 위한 한옥 집단 지구인 북촌에는 열광하면서도 일반 서민의 생활 양식이 밴 익선동 166번지의 가치는 도외시하고 있다.

북촌 가회동이 깔끔하고 아름답기에 보존 가치가 있다면 익선동 한옥 주거 환경을 업그레이드하면 된다. 그리고 대지주의 북촌 가회동이 그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면, 서민을 위해 지어졌던 익선동 166번지의 가치 또한 존중받고 지켜져야 한다.

더군다나 익선동 166번지는 북촌 가회동에 앞서 개발된 한옥 집단 지구이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옥 집단 지구이기도 하다. 익선동 166번지에는 서울이 고려 시대 남경이던 시절의 골목길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렇다면 그 지표 밑에는 어마어마한 보물이 숨어 있을 수 있고, 더 많은 조사가 필요하겠으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동네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지역은 재개발로 묶여 있다

지난 13일, 동대문 쇼핑 타운의 공장 역할을 하는 창신동 뉴타운이 드디어 해제됐다. 개인적으로 창신동 봉제 공장들의 지역 협동조합 결성을 몇 년에 걸쳐 고민하고, 미력이나마 지역 사회에 도움을 주려 노력하던 중 듣게 된 매우 소중하고 가치 있는 소식이었다. 서울시는 중재자로서 느리지만 당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렇다면 재개발지역으로 묶여 있는 익선동 166번지, 약 100년 전 서민을 위해 건설된 가장 오래된 한옥 집단 지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불과 10년의 차이가 북촌을 변화시켰다. 만약 10년 전 어느 개발업자가 나타나 북촌 한옥들은 누추하므로 초고층 아파트 단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면, 그래서 그 개발안이 채택돼 북촌이 사라졌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북촌을 보고 있을까.

<필자 주> 정세권에 대한 자료는 주로 김란기 박사 논문과 인터뷰 등이었고, 그 외 옛 신문 기사를 일일이 찾아가며 궤적을 꿰맞추었다. 우리가 북촌이라는 외형에는 열광하고 있으나, 부끄럽고 부끄럽게도 북촌을 만든 당사자는 잘 모르는 형편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정세권의 자손, 정몽화 씨가 책 <구름 따라 바람 따라>에 정세권에 대해 기록했다는데도 이 책을 도저히 구할 수 없었던 점이다. 정세권 선생의 후손들과 꼭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kkim2@snu.ac.kr

도시 이야기
<1> 서울, ‘200년 역사’ 상하이보다 못하다…왜?
<2> 휘청휘청 용산 개발, ‘티엔즈팡’만 미리 알았어도…
<3> 서울 최고의 한옥 지구, 역사 속으로 사라지나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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